헨리 포드는 20세기 초, 자신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를 설립해 미국의 모든 도로를 포드 자동차로 뒤덮어버리며 세계 최초의 억만자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산업혁명의 정수를 보여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동차 제작 공정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자동차 분야 이외의 다른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경쟁자들의 공세 속에서 위기에 처한 포드자동차, 헨리 포드 2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할아버지인 헨리 포드 1세로 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경영의 일선에서 포드 자동차를 운영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싶었고, 모터스포츠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전략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르망 24시 3회 우승에 빛나는 페라리 250 테스타로사
르망 24시는 24시간동안 끊임없이 달리며 자동차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세계최고의 내구 레이스 경기입니다. 24시간동안 가장 많은 바퀴수를 달린 팀 만이 승리의 환희를 맛 볼수 있습니다.
르망 24시에서의 우승은 브랜드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에 현재까지도 최고의 브랜드들이 자웅을 겨루는 ‘콜로세움’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총 9년동안 1차례를 제외한 르망 24시의 모든 우승은 페라리의 창업자, 엔초 페라리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 2세는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인수하기 위해서 엔초 페라리를 만나게 되죠.
헨리 포드 2세는 18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당시 스쿠데리아 페라리 1년 운영 예산) 제시하며 페라리의 지분 90% 인수를 제시했고, 엔초 페라리는 그의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모터스포츠에서의 위상은 뛰어났지만, 미국 전체를 호령하는 기업, 포드 자동차에 비해 당시 페라리의 크기는 작은 공방 수준이었고, 변화의 기로에서 엔초 페라리는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페라리와 포드, 두 거장의 자존심을 건 대결
"모터스포츠에 대한 권한은 나의 몫이다. 그에 대한 예산 결정도 나의 몫이다." – 엔초 페라리
1달 동안의 협상 과정에서의 분수령은 ‘모터스포츠’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페라리 자신의 영혼이자 분신이었고, 그에게는 자신의 스포츠카를 많이 파는 것 보다 모터스포츠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모터스포츠에 자신의 이름, ‘페라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엔초 페라리의 의지는 분명했고, 포드의 제안을 거절 했습니다. 성공적인 합병이라 자신했던 헨리 포드 2세에게 국제적인 망신을 준 셈이었죠.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두 브랜드의 긴장은 극에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엔초 페라리의 등 뒤에서 거대 골리앗, 포드는 페라리를 무찌를 날카로운 비수를 준비합니다.
제국의 역습, 타도 페라리의 선봉에 선 포드 GT40
건방진 페라리 녀석, 르망 24시에 포드의 깃발을 꽂아! – 헨리 포드 2세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신경전은 자연스럽게 르망 24시로 이어졌고, 포드는 자사의 기술력과 자본을 총동원해 심기일전으로 레이스에 임합니다. 제국의 역습에 사용된 비장의 무기는 바로 ‘포드 GT40’, 1963년 4월 1일 처음 모습을 드러낸 포드 GT40은 2년간의 시행착오와 엔진개량을 거쳐, 1966년 르망 24시의 포디움을 모두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1966년, 르망 24시를 수 놓은 포드 GT40 Mk2
1966년, 세 대의 포드 GT40이 동시에 들어오는 장면은 페라리의 심장을 강타하는 순간이었고, 제국의 역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포드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년동안 르망 24시 포디엄의 정상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며 그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참고로 1966년 당시 포드 GT40을 몰며 최초의 우승을 가져다 준 드라이버는 바로 멕라렌(Mclarlen)의 창업자인 브루스 멕라렌(Bruce Mclaren)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돌고 도는 법이죠.
페라리 330 P4, 페라리의 귀환
자본력과 규모를 앞세워 레이스에 나선 포드 앞에 페라리는 풍전등화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본진을 빼앗긴 엔초 페라리는 그대로 주저 앉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페라리의 가장 큰 힘은 방대한 ‘레이스 스펙트럼’이었죠. 르망 24시 뿐만 아니라 포뮬러 원(F1)에서도 경험을 축적한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포뮬러 원에서 사용된 12기통 엔진을 개량해 만반의 준비를 가합니다. 그는 헨리 포드 2세의 안방인 미국, 그 미국에서 열리는 내구 레이스 대회 ‘데이토나 24시’에 출전하기 위해 최고의 카드를 꺼내들게 됩니다.
바로 ‘페라리 330 P4′ 입니다.
다음 문단을 읽기에 앞서 아래의 영상을 잠시 감상해보시죠. 엔초 페라리의 열정이 담긴 뜨거운 엔진소리와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노면을 가르는 환상적인 애티튜드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선두에 선 포드 GT40과 후미에 있는 페라리 330 P4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플로리다, 여기는 데이토나 서킷.
헨리 포드 2세는 엔초 페라리의 신형 기함, 페라리 330 P4를 저지하고자 포드 GT40 6대를 데이토나 24시에 투입하였습니다. 미국 시장에 페라리의 깃발이 나부끼는 것은 헨리 포드 2세에겐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동시에 들어오는 3대의 페라리, 완벽한 복수전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1966년 르망 24시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합니다. 3대의 페라리가 동시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모습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복수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헨리 포드 2세의 모국인 미국에서 말이죠. 데이토나 24시에서의 우승은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데이토나에서의 반격 이후, 페라리라는 이름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으로, 제국의 역습 이후의 제다이의 귀환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1년 후, 1968년 파리 오토 살롱. 여기는 페라리의 부스.
롱 노즈와 숏 데크의 전통적인 비율을 가진 그란 투리스모(장거리 여행용 자동차의 이탈리아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4,390cc 콜롬보 12기통 엔진과 제로백 5.4초의 준수한 성능을 지닌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경쟁모델. 이탈리아 디자인 하우스 피닌파리나의 레오나르도 피오라반티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곡선은 지금도 보는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페라리 데이토나, 365 GTB/4의 애칭.
그 이름은 바로 ‘페라리 365 GTB/4′
레이스가 아닌 대중을 위한 스포츠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와 사람들은 이 차를 ‘데이토나’라 부르기 시작했죠. 아직도 가시지 않은 1967년 데이토나 24시에서의 우승은 고스란히 페라리 그란투리스모의 명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는 클래식카 반열에 오르며 소더비 경매에서 20억 이상의 가격에 낙찰된 모델이기도 합니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잠시 페라리 데이토나의 휠셋을 보기로 하죠.
조금 더 자세히 볼까요?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좌측 상단에 새겨진 이름, 캄파놀로(Campagnolo)
헨리 포드 2세와의 대결, 르망 24시에서의 통한의 패배, 데이토나 24시에서의 극적인 복수, 그리고 바로 다음해에 출시한 페라리의 기함 ‘페라리 데이토나.’
페라리 데이토나에는 엔초 페라리의 열정과 환희 그리고 세계 최고의 카로체리아(자동차 공방)중 하나였던 피닌파리나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하는 스포츠카였죠.
페라리와 피닌파리나,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브랜드 ‘캄파놀로'(Campagnolo) 였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중시한 ‘정점을 향한 집착’ 그들만의 에토스*(Ethos)였죠. 만약 여러분이 지금 캄파놀로 구동계를 사용하고 있다면, 슈퍼레코드의 손 끝에서 잠시나마 엔초 페라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에토스(Ethos) : 에토스(고대 그리스어: ἦθος, ἔθος, ēthos)는 ‘성격’, ‘관습’ 등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라는 단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토스는 화자(話者) 고유 성품을 뜻한다. 체형,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선택, 시선, 성실, 신뢰, 카리스마 등이 에토스에 속한다. / 출처, Wikipedia
한 시대를 풍미한 자동차 CEO, 핸리 포드 2세
헨리 포드는 20세기 초, 자신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를 설립해 미국의 모든 도로를 포드 자동차로 뒤덮어버리며 세계 최초의 억만자자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산업혁명의 정수를 보여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동차 제작 공정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자동차 분야 이외의 다른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경쟁자들의 공세 속에서 위기에 처한 포드자동차, 헨리 포드 2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할아버지인 헨리 포드 1세로 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경영의 일선에서 포드 자동차를 운영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싶었고, 모터스포츠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전략 변화를 모색하게 됩니다.
르망 24시 3회 우승에 빛나는 페라리 250 테스타로사
르망 24시는 24시간동안 끊임없이 달리며 자동차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세계최고의 내구 레이스 경기입니다. 24시간동안 가장 많은 바퀴수를 달린 팀 만이 승리의 환희를 맛 볼수 있습니다.
르망 24시에서의 우승은 브랜드의 기술력을 인정받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에 현재까지도 최고의 브랜드들이 자웅을 겨루는 ‘콜로세움’으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총 9년동안 1차례를 제외한 르망 24시의 모든 우승은 페라리의 창업자, 엔초 페라리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 2세는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인수하기 위해서 엔초 페라리를 만나게 되죠.
헨리 포드 2세는 18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당시 스쿠데리아 페라리 1년 운영 예산) 제시하며 페라리의 지분 90% 인수를 제시했고, 엔초 페라리는 그의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모터스포츠에서의 위상은 뛰어났지만, 미국 전체를 호령하는 기업, 포드 자동차에 비해 당시 페라리의 크기는 작은 공방 수준이었고, 변화의 기로에서 엔초 페라리는 고민을 거듭하게 됩니다.
페라리와 포드, 두 거장의 자존심을 건 대결
1달 동안의 협상 과정에서의 분수령은 ‘모터스포츠’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페라리 자신의 영혼이자 분신이었고, 그에게는 자신의 스포츠카를 많이 파는 것 보다 모터스포츠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모터스포츠에 자신의 이름, ‘페라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엔초 페라리의 의지는 분명했고, 포드의 제안을 거절 했습니다. 성공적인 합병이라 자신했던 헨리 포드 2세에게 국제적인 망신을 준 셈이었죠.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두 브랜드의 긴장은 극에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엔초 페라리의 등 뒤에서 거대 골리앗, 포드는 페라리를 무찌를 날카로운 비수를 준비합니다.
제국의 역습, 타도 페라리의 선봉에 선 포드 GT40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신경전은 자연스럽게 르망 24시로 이어졌고, 포드는 자사의 기술력과 자본을 총동원해 심기일전으로 레이스에 임합니다. 제국의 역습에 사용된 비장의 무기는 바로 ‘포드 GT40’, 1963년 4월 1일 처음 모습을 드러낸 포드 GT40은 2년간의 시행착오와 엔진개량을 거쳐, 1966년 르망 24시의 포디움을 모두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1966년, 르망 24시를 수 놓은 포드 GT40 Mk2
1966년, 세 대의 포드 GT40이 동시에 들어오는 장면은 페라리의 심장을 강타하는 순간이었고, 제국의 역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포드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년동안 르망 24시 포디엄의 정상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며 그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참고로 1966년 당시 포드 GT40을 몰며 최초의 우승을 가져다 준 드라이버는 바로 멕라렌(Mclarlen)의 창업자인 브루스 멕라렌(Bruce Mclaren)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돌고 도는 법이죠.
페라리 330 P4, 페라리의 귀환
자본력과 규모를 앞세워 레이스에 나선 포드 앞에 페라리는 풍전등화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본진을 빼앗긴 엔초 페라리는 그대로 주저 앉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페라리의 가장 큰 힘은 방대한 ‘레이스 스펙트럼’이었죠. 르망 24시 뿐만 아니라 포뮬러 원(F1)에서도 경험을 축적한 그의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포뮬러 원에서 사용된 12기통 엔진을 개량해 만반의 준비를 가합니다. 그는 헨리 포드 2세의 안방인 미국, 그 미국에서 열리는 내구 레이스 대회 ‘데이토나 24시’에 출전하기 위해 최고의 카드를 꺼내들게 됩니다.
바로 ‘페라리 330 P4′ 입니다.
다음 문단을 읽기에 앞서 아래의 영상을 잠시 감상해보시죠. 엔초 페라리의 열정이 담긴 뜨거운 엔진소리와 아름다운 곡선 그리고 노면을 가르는 환상적인 애티튜드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선두에 선 포드 GT40과 후미에 있는 페라리 330 P4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플로리다,
여기는 데이토나 서킷.
헨리 포드 2세는 엔초 페라리의 신형 기함, 페라리 330 P4를 저지하고자 포드 GT40 6대를 데이토나 24시에 투입하였습니다. 미국 시장에 페라리의 깃발이 나부끼는 것은 헨리 포드 2세에겐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죠.
동시에 들어오는 3대의 페라리, 완벽한 복수전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엔초 페라리는 1966년 르망 24시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합니다. 3대의 페라리가 동시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모습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복수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헨리 포드 2세의 모국인 미국에서 말이죠. 데이토나 24시에서의 우승은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데이토나에서의 반격 이후, 페라리라는 이름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으로, 제국의 역습 이후의 제다이의 귀환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1년 후,
1968년 파리 오토 살롱.
여기는 페라리의 부스.
롱 노즈와 숏 데크의 전통적인 비율을 가진 그란 투리스모(장거리 여행용 자동차의 이탈리아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4,390cc 콜롬보 12기통 엔진과 제로백 5.4초의 준수한 성능을 지닌 람보르기니 미우라의 경쟁모델. 이탈리아 디자인 하우스 피닌파리나의 레오나르도 피오라반티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곡선은 지금도 보는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 이름은 바로 ‘페라리 365 GTB/4′
레이스가 아닌 대중을 위한 스포츠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와 사람들은 이 차를 ‘데이토나’라 부르기 시작했죠. 아직도 가시지 않은 1967년 데이토나 24시에서의 우승은 고스란히 페라리 그란투리스모의 명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는 클래식카 반열에 오르며 소더비 경매에서 20억 이상의 가격에 낙찰된 모델이기도 합니다.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잠시 페라리 데이토나의 휠셋을 보기로 하죠.
조금 더 자세히 볼까요?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좌측 상단에 새겨진 이름, 캄파놀로(Campagnolo)
헨리 포드 2세와의 대결,
르망 24시에서의 통한의 패배,
데이토나 24시에서의 극적인 복수,
그리고 바로 다음해에 출시한 페라리의 기함
‘페라리 데이토나.’
페라리 데이토나에는 엔초 페라리의 열정과 환희 그리고 세계 최고의 카로체리아(자동차 공방)중 하나였던 피닌파리나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주목하는 스포츠카였죠.
페라리와 피닌파리나, 그들의 마지막 선택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브랜드 ‘캄파놀로'(Campagnolo) 였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중시한 ‘정점을 향한 집착’ 그들만의 에토스*(Ethos)였죠. 만약 여러분이 지금 캄파놀로 구동계를 사용하고 있다면, 슈퍼레코드의 손 끝에서 잠시나마 엔초 페라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에토스(Ethos) : 에토스(고대 그리스어: ἦθος, ἔθος, ēthos)는 ‘성격’, ‘관습’ 등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라는 단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토스는 화자(話者) 고유 성품을 뜻한다. 체형,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선택, 시선, 성실, 신뢰, 카리스마 등이 에토스에 속한다. / 출처, Wikipedia